스승님의 복을 입으니 세상 사람은 비방과 웃음으로써 (성훈기 편)
도성훈통고 지(智) 편은 금강대도 2세 도주(도성사부모)님 께옵서 1930~ 1950년대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의 성훈기(聖訓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훈통고 성훈기 智편. 4-57. 134p
이상범(호 향복)이 개도 55년 무진(1928)년 11월 25일에
(1) 충북 진천면 이월면 중산리 집에서 출생하여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다 계신 슬하(구경시하)에서 장성하였다. 9살에 소학교에 들어가서 15살(성동)에 졸업하였다.
18살 되던 을유(1945)년 1월 18일에 백곡면 사송리에 사는 박원경 둘째딸 윤정이를 만나 결혼하였다. 개도 78년에 육군 포병으로서 동부, 중부, 서부 전선에서 지나다가 이미 5년에 미침에 28살 되던 11월에 경상사로서 제대하여 고추농사를 지어 많이 수확하였다.
29살 때에는 다른 손을 빌리지 않고 옛집을 철거하고 아버님으로 더불어 새 건축을 이루니 퍽(자못)이 대견한것이었다.
30살이 되던 해 정유(1957)년 5월 28일에 도성사부님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박호단 도인이 전해주고 모름지기 눈물 흘리며 행해 가는 것을 보고 나 또한 마음이 울적하여 고뇌가 많을 적에 빨리 본부에 뛰어가고자 하였으나 한 번도 실행하지 못한 것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기 어려운 바였다.
그 뒤 5개월이 지나서 11월 2일 대성사부님 제향 참석을 마음으로 결정하고 먼저 양친부모님의 허락을 얻고 나서 곧 술과 고기를 금하고 그날 총회에 나가니 도인들이 한결같이 들고 한결같이 움직임은 예절이 분명하고 타인의 모범이 됨은 물론이요, 도덕은 중생을 제도하는데 남음이 있으니 성문에 들어온것으로써 생각하여봄에 다행함이었다.
그래서 도덕이 성인의 몸과 성역(금천구내)에 빛나고 각 문장에 넘쳐흐르시니 충성과 효도와 성경은 사람의 근본이요, 대도가 증명됨은 오륜을 행하는 집이며 영산(수도처=즉 금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혜로운 달이 비추니 덕을 하늘과 땅의 도인 집에서 씀이라.
좋게 마음과 성품을 갖고 노래하고 춤추는 땅에 멀리 맑게 빛나는 흰 구름집을 가리킴이로다. 그날 도인의 뜻을 세우고 12월 25일 총회에 중복 차림으로 참석하니 도성사모님께서 분부하시기를 “진천에서 온 자는 평소에 사부님의 존안(尊顔)을 배알하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그 중복을 갖추었느냐? 누가 가르쳐 주었느냐?”칭찬을 말지 않으시며 이어 말씀하시기를 “금강도 향기를 찾아서 들어온 고로 향복이라느 도호로서 정했으니 다음번에 하사할 것이라” 하시니라. 때의 풍속으로써 말하면 부모의 복을 행하지 아니하는 세상에 하물며 감히 성사님의 복을 입으니 세상 사람은 비방과 웃음으로써 일삼으나 나의 조부모님과 다못 부모님은 반대하지 않으시었다. 대개 그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이니 섬김이 같음이라 하니 현재 복제가 분명하고 정확하여 미래 법강이 되니 흰옷과 흰 건으로 사계절을 입음에 다만 잘 때에만 벗었다. 춥고 더움을 피하지 않고 번거로운 농사에 일이 바쁘더라도 한 번도 고치지 아니하니 5년 동안에 5개의 선이 떨어졌다.
한 부락 도인 8,9명이 다 소복을 하니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이월면 중산리의 갈미 부락은 어떻게 그 상주들이 많으냐?” 하였다. 이 가운데 이원단은 무릇 15세(志學)의 나이로써 성심으로 복제를 행하니 참으로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부모님이 쌀 두 가마니를 주셔서 성금과 여비로써 사용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