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훈통고 지(智) 편은 금강대도 2세 도주(도성사부모)님 께옵서 1930~ 1950년대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의 성적기(聖蹟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훈통고 성적기 智편. 5-7-5.
(5) 김도현(호 취사)이 말하기를
을유(1945)년 6월 17일경 진천군 덕산 면사무소에 재직할 때에 조송산과 김탄정 두 사람이 사부님 분부를 모시고 와서 말하기를 사부님께서 병보석으로 출감하신 후에 병원에 계시다가 미리 재수감 되실 것을 아시고 밤절 토굴에 계시는 중에 이불과 베개가 젖고 등불이 밝지 못하며 호흡이 곤란한 고로 사부님께서 옮길 뜻이 있으니 말씀하시기를
“누가 도현이네 집에 가서 거처할만한 장소를 물어 오겠느냐?”하사 “우리가 왔노라” 하였다.
저(도현)는 뜻밖의 일이며 또 타지방에 나와 있는 고로 능히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 작별 하였다. 이에 가족협의를 하고 결정하여 기다림이라.
6월 20일에 두 사람이 또 오는 고로 결정된 일을 말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새집을 건축하는 데 있어서 내적 준비는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책임을 지고 그 외에 준비는 취사가 책임을 지라”는 명이 있으셨다고 하여 굳은 각오로써 작별하고 22일에 두 사람이 또 온 고로 함께 이 터를 볼 새, 덕산면 두촌리 외 기타 지역을 답사하였으나 좋은 곳이 없어서 포기한 후에 저는 마침 출장 계획이 있어서 다음으로 미루고 26일에 다시 만나 터를 덕산면 산수리(방골)에 정하니 그곳은 이월면 가산리 인접지로 경주정씨 대촌이며 저의 담임 서기로 왕래하는 지역이요, 서대석이 또한 덕산 면장으로 있으니 터를 얻고 목재를 구함과 사람을 동원시켜 작업함이 쉬웠다.
7월 1일에 두 사람이 또 와서 진행사항을 말하니 영운경을 주면서 “수시로 공부를 해라”하고 길을 떠나더니 7월 7일에 이르러 광복의 기쁨을 맞아 그 일이 이루지 못하니 생각해보면 한편 죄송함을 금할 수가 없으며 또 한편 성은이 갓이 없음을 가득 느낄 새 머리를 북쪽 하늘에 돌이킴에 감격한 눈물이 비 내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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