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대도 .도덕으로 개화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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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금강대도의 항일투쟁

인월산(仁月山) 2017. 3. 12. 21:26

* "실록 충남 반세기  구한말에서 6. 25까지  " 책자  224 ~233p  발췌, 도서발행1983년 5월 25일

 

                     피로 물든 금강대도의 항일투쟁

 

대전과 조치원 중간지점 아스팔트 국도에서 벗어나 냇가를 따라 동쪽으로 3km 쯤 가다보면 금화산(金華山)이 길게 누워 있다. 그 금화산 산등성이가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고 있는 따뜻한 양지쪽에 동화속에나 나오는 궁성같은 건물이 늘어서 있는데 여기가 바로 금강대도(金剛大道)의 본산이다.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 신도 36만에 창시 1백 10여년을 자랑하는 금강대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풍파도 없이 성장해온 것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나 금강대도는 이 민족이 겪어야 했던 그 수난을 알몸으로 견디며 항거함으로써 그 역사의 농도를 진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이승여(李承如) 제 1대 도주(道主)의 창시이념(創始理念)으로부터 비롯된다. 1874년 5월 19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에서 출생한 이승여도주는 한산이(韓山李)씨로 목은 이색의 17대손. 그는 나라가 망해가는 혼미속에서 정신적으로 그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고 나라를 찾겠다는 생각에서 금강대도를 창시 유.불.선(儒.佛.仙) 3종을 일원화하는 도사상과 제도중생을 내세웠다.

유교,불교.선사상을 하나로 이념화시킨 금강대도는 또한 계급타파, 남녀평등, 단군과 홍익인간을 내세우기도 했다.

특히 그 무렵 남녀평등이라든지 계급타파 같은 것은 이야기도 꺼낼 수 없던때 이승여 도주는 이것을 철저히 가르쳤다.

제1대 도주는 1910년 4월 8일 강원도 통천으로부터 충남 논산군 두마면 백암동으로 이전, 포교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때의 신도수가 10만을 헤아렸다. 날로 신도수가 늘고 도세(道勢)가 확장되자 이승여도주는 1922년 현재의 장소인 금천리에 대법당을 건립 두 번째의 금강대도 신도마을로 변했다. 재정도 넉넉하여 대법당을 비롯 부속건물은 극히 웅장했다.

도주가 직접 태백산을 답사 큰 재목을 골라 뗏목으로 운반했으며 기와도 특별히 도안하여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도세는 전국적으로 뻗혀 제일 멀리는 함경도에서 제주도에까지 분관을 만들었고 신도도 20만을 넘었다.

이처럼 신도수가 늘어나고 도세가 확장되자 일제관헌은 점차 금강대도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충남도경무부(忠南道警務部) 고등계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금강대도에 대한 사찰을 정식으로 명령했으며 이 명령에 따라 조치원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의 금천리 출입이 빈번해졌다.

“우리 백성들은 유교다 불교다하고 서로 배척해서는 안된다. 태양은 하나며 만백성의 태양인데 내 태양이다, 네 태양이다하고 싸워서는 안되고 적대해서도 안된다. 우리 단군할아버지의 후손들은 귀하고 천함, 남과 여를 가리지 말고, 민본사상에 따라 서로 위하고 사랑하라” 이와같은 도주의 가르침은 일본 형사들의 귀를 긴장시켰으며 특히 단군할아버지의 후속 운운... 하는 것이야말로 배일단체(排日團體)로 규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1937년 도청이전후 공주에 남아있던 공주지방법원이 대전으로 이사를 하였고 또한 이해부터 일제는 간도 이민을 배일인사의 추방방법으로 사용했는데 그 굴레는 그해 2월 이곳 금강대도에 씌워지기 시작했다.

즉 총독부는 1만 1천 9백명의 간도이민을 추진하면서 충남에도 그 인원을 할당했는데 충남에서는 배일단체로 규정한 금강대도 신자들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나라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정든 고향산천과 마음의 신앙을 버리고 이국만리 만주벌판으로 떠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숱한 강요가 있었지만 금강대도 신도들은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신앙과 고향을 지켰다.

금강대도 종심원장인 김도현(金道顯)씨는 그때의 상황을,

“군과 면에서 번갈아 쫓아다니며 간도이민을 권유했습니다. 마을곳곳에는 이민 안내서가 붙어 있었고 달콤한 말로 유혹하기도 하고 위협도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도장찍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신앙들이 강했던 것이죠, 우리들은 일본 관리들이 찾아오면 “ 당신들은 우리들을 분산시키고 쫒아내어 결국 우리들의 신앙을 없애려고 하겠지만 그겉은 어림없는 일이다. 우리는 샘물과 같아서 당신들이 아무리 물을 퍼내도 퍼낸만큼 샘물은 고일것이다고 반박했죠“ 라고 말했다.

도주의 옆에서 보좌하고 있던 변영의(邊榮義)씨도 “결국 1937년 3월 10일 간도로 떠난 이민속에 우리 신도들은 모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도 이민 정책은 계속됐는데 그해 5월 11일 일본 척무성(拓務省)은 만주에 한국인 노동자 10만명을 이민시킬 것이라고 발표했고 계속해서 그달에 7천명을 충남 전남지방에서 차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해서 싸웠는데 특히 1923년 2월 있었던 이민차출이 가장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즉 선만척식회사(鮮滿拓殖會社)에서 3 천명을 이민을 차출, 만주로 실어 날랐는데 일제는 이기회를 악용하여 우리 신도들을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들의 위협에 넘어간 신도가 있어도 수송도중에 모두 탈출하여 귀향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와같은 방법으로는 금강대도를 해체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후 탄압의 수단도 바뀌게 된거죠“ 하고 회상했다.

 

일제가 벌인 「금강대도」 탄압 제 3라운드는 1937년 7월 中.日전쟁이 발발하면서 시작됐다. 그해 총독부는 일본천황의 사진을 공공기관과 각급학교에 게시, 아침저녁으로 경배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총독부의 강력한 황국화운동은 「금강대도」의 이념과 신앙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성직(李成稙) 2대 도주는 20만 신도들에게 “우리 배달민족은 단군의 자손이지 천황의 자손 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신도들은 신사참배와 일본천황을 경배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날조된 논리에 귀 기울여도 안된다. 또한 우리는 신민(臣民)이 되겠다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 선언했다. 

이성직(李成稙) 2대 도주의 이 선언은 「금강대도」신앙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민족정신의 사수를 표현한 것인데 이 보고를 들은 총독부 시오하라학무국장은 정교원 충남지사에게 「금강대도」를 굴복시키던가 아니면 없애버리는 명령을 긴급 하달했다. 이렇게 일본의 황민화(皇民化) 정책과 일본불교에 통합강요를 금강대도가 정면으로 거부하자 다까오 충남도경 경무부장은 총독부 경무총감과 협의 금강대도 말살작전을 세웠다. 이에대한 총책임은 충남도경 고등계형사 ‘야마모도’(山本)라는 경부(지금의 경감)가 맡았다.

다까오부장과는 달리 야마모도경부는 바늘이라는 별명이 붙은 만큼 침착하고 치밀했으면 날카로왔다.

다까오부장은 빨리 작전을 개시하지 않는다고 성화였지만 그럴때마다 야마모도는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당할 뿐입니다. 금강대도는 하나의 조직을 가진 나라와 같습니다. 따라서 미리 선전포고를 하고 쳐들어가면 장기간의 전쟁이 시작되기 때문에 불리할 뿐입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일시에 갑자기 공격을 퍼부어야만 됩니다. 한꺼번에 모두 잡아버리고 그들의 주택과 법당 건물들을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완전공격에 의한 완전승리만이 그들을 영원히 쓸어버리는 것이 됩니다”하고 그의 엄청난 음모를 진행시켜던 것이다. 따라서 공연히 이날 그들을 잡아 넣게되면 오히려 사태를 시끄럽게 할 우려가 있고 심지어 시위까지 발생할는지 모릅니다”하고 건의했다.

따라서 경찰은 금강대도의 종교행사가 거의 없고 시국의 흐름이 가장 유리한 12월로 행동 개시일을 변경했다. 다까오경무부장은 “12월 7일 밤12시를 작전일로 정한다. 모든 배급제가 더욱 강화되고 이때면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하고 야마모도에게 지시했다. 마침내 12월 7일 아침이 밝아왔다.

 

당시 금강대도 말살작전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아까쯔끼’작전이라고 명명했다. 아까쯔끼는 당시 서울-부산간을 운행하던 특별열차의 이름이었는데 서울-부산간을 6시간 45분에달리는 이열차는 지금의 새마을호 이상으로 인기가 높았었다.

그렇게 재빠르게 해치우겠다는 뜻으로 「아까즈기」작전이라.... 아주 좋은 착상이야, 다까오 경무부장은 그렇게 야마모도 경부를 칭찬했다. 야마모도경부는 마치 고지점령을 위해 작전지도를 작성하듯 ‘금강대’신도들이 살고 있는 금남면 금천리 일대의 지도를 상세히 작성했다. 그리고 당시 이곳을 담당하고 있던 우편배달부를 매수하여 각 옥별로 세대주 이름을 파악했다. 따라서 이지도 한 장만 펴놓으면 그 속에는 금천리 마을의 지형지세는 물론 모든 집들이 그려져 있고 그 집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이름까지 적혀있어 밤중이라도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야마모도경부는 충남도경만이 아니라 ‘아까즈끼’ 작전에 공주.조치원. 대전등 3개 경찰서를 동원 각 경찰서에서 민첩하고 무술솜씨가 좋은 경찰 40명씩을 차출했다. 이렇게 분산시켜 검거해야만 뒤에 남은 신도들의 저항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이처럼 많은 형사들을 필요로 한 것은 1가구당 2명씩 담당 하고 도주와 간부들은 10여명씩 배치 가옥을 완전포위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까오 경무부장은 야마모도 경부의 치밀한 준비가 끝나자 1941년 10월 10일을 D-데이로 정했다. 그러나 10월 10일은 행동을 개시하기에는 적합지가 않습니다. 추석은 조선사람의 명절일뿐아니라 금강대도에서는 이날 단군영정앞에서 성대한 예식을 행하기 때문에 전국 각처에서 신도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그런데 1941년 12월 7일은 바로 일본의 하와이 기습이 있기 하루전으로 우연히도 금강대도의 대검거 선풍이 있고나서 이튿날 즉 1941년 12월 8일 마침내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를 급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반발 시킨 것이다. 그러나 금천리 마을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한 마음으로 1941년 12월 7을 맞았으며 아무도 그 어떤 폭풍이 이마을을 휩쓸 것인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침부터 내리는 함박눈이 어느때보다 신도들의 가슴에 평화와 축복이 느끼게 했다.

야마모도 경부는 그날 아침 각 경찰에서 차출돼온 형사들에게 “밤 11까지 금천리 뒤산에 빠짐없이 집합, 11시 30분에 각자 맡은 집을 확인하고 12시 정각에 일제히 집안으로 뛰어들어 신도들을 검거하며 모든 도서와 서류를 압수한다음 새벽 1시30분까지 감성 국도에 집합하라. 만약 실수가 있어 한사람이라도 놓치게 되면 그 책임을 묻겠다” 엄명을 한다음 이들에게 특별수당을 주어보냈다. 이성직 2세도주는 야마모도 경부가 직접 맡았다. 밤이 되어도 눈은 그치질 않았다. 11시가 되어 다시 금천 뒷동산에 집합한 형사들은 야마모도가 시키는대로 각자 맡은 집을 확인하고 돌아와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형사들은 도독 고양이처럼

골목을 뒤졌으며 동네 개들이 이들을 보고 마구 짖어댔다 .여느때 보다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소리에 몇몇 사람들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피기도 했으나 형사들이 마을을 에워사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당시의 상황을 직접 겪고 구속까지 됐던 유치흥(兪致興)옹은 다음과 같이 그때를 회상했다. “그날 아침 나는 대전에 나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대평리에 나가 차를 타려고 하는데 얼굴을 아는 형사를 만났습니다. ‘그 형사는 나를 보더니 히죽이죽 웃으면서 오늘 따뜻한 솜바지 저고리나 준비하지 어디를 가느냐?’ 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하니까 ‘아니 아무 뜻도 없고 날이 추워지니 옷 잘 입으라는 뜻이다’ 며 시치밀 떼더군요, 나중에야 그 형사가 한 말이 무슨 뜻인가 알았습니다.

아니나 드를까 그날 밤12시쯤 되었는데 누가 담을 뛰어 넘어와서는 느닷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아침에 본 그 형사였습니다. 또 한사람 형사는 방문을 잠그고 서있었고 아침에 만난 형사는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놀랄 것 없으니 순순히 하라는 대로만 하라는거에요, 우선 금강대도에 관한 문서를 모두 내놓으라는 것 이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런 것 없다고 거절했죠. 그랬더니 직접 천정. 벽장. 심지어는 장판밑까지 샅샅이 뒤지면서 헌종이쪽지 한 장만 나와도 모두 압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석구석에서 찾아낸 서류와 경전(經典)을 들춰낸 형사들은 보따리에는 싸고는 마지막으로 내앞에 오더니 손을 내밀라는 거예요, 나를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한다고 하더니 무조건 고랑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도주님께서 평소부터 어떤 탄압이 오더라도 마음을 단단히 가지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하려고 웃음을 띠우며 밖으로 나왔죠, 그랬더니 골목이 온통 소란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나만이 아니라 우리 신도 모두가 이렇게 한꺼번에 당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방에는 우는소리가 들리고 고함이 터지고....정말 이때처럼 항일의 울분이 용솟음친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주의 반항은 완강하여 시간이 많이 걸렸다. 도주는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 책임질테니 나머지 신도들은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으며 그러기 전에는 결코 검속에 응할 수 없다고 버틴 것이다. 도주와 경찰이 이처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동안 기미를 알아차린 젊은 신도 몇 사람은 집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는 이들 젊은 신도들은 마을고갯길에 숨어있다가 경찰을 습격하여 도주를 구출해 내기로 했다. 젊은 신도들은 각자 몽둥이를 들고 고개에 숨어서 이 곳을 지날 경찰의 행렬을 기다렸다. 이윽고 새벽 2시쯤 되었을 때 금강대도 신도들을 수갑과 포승으로 묶은 행렬이 나타났다. 물론 그속에는 이성직(李成稙) 도주도 묶인채 끌려가고 있었다.

젊은 신도들은 일제히 “야”, 소리를 지르며 일본 경찰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도주를 불렀다. 하지만 이들 소수의 젊은이들이 절대다수의 무술 경찰관들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오히려 젊은신도들에게는 보안법 위반뿐 아니라 경찰관에게 몽둥이질을 했다하여 공무집행 방해죄까지 적용시켰다.

이들이 일경에 끌려가던 밤 금천리 마을은 흡사 초상집과 같았다. 구심점이 돼왔던 도주를 잃은 신도들, 남편을 빼앗긴 아낙네들, 아버지를 놓친 어린 아이들, 그 울음소리가 하늘과 땅에 메아리친 것이다.

야마모도 경부는 감성에 도착하자 검속자들을 최종 확인했는데 돌려보낸 병약자를 빼고도 도주이하 53명이나 되었다. 야마모도 경부는 이들 53명을 3개 경찰서로 분산시킨 후 대기중인 트럭에 태워 날이 새기전에 현지 경찰에 도착, 유치장에 수감토록 지시했다.

이성직 도주는 야마모도의 직접호송아래 대전경찰서에 수감시켰다. 이들이 각각 트럭에 분승하여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펑펑 쏟아져 내리던 눈도 멈추었다. 이성직도주가 대전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던날 밤 그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하와이)을 공습함으로써 미.일 전쟁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도주는 아주 명랑한 얼굴이었는데 감방을 지키던 간수가 “무엇이 좋아 그러느냐?”고 책망하자 도주는 “좋을 수 밖에 없다. 이제 너희 일본이 망할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이 전쟁에서 틀림없이 망하고 말 것이다.”하고 예언했다.

따라서 경찰은 이들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김도현.변영의씨 등은 “그들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꾸로 메달아 놓고 물을 먹이는 것, 추운밤에 발가벗겨 놓고 찬물을 끼얹는 것, 그리고 전기고문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앙을 버리고 천황폐하의 신민(臣民)이 되겠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감 1개월이 지나자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읍니다”하고 증언했다.

1개월이 지나자 모진 고문에 목숨을 잃는 신도가 속출한 것이다. “1942년 1월 어느날이었습니다. 대전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김창희가 매에 못이겨 유치장에서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최초의 희생자가 된거죠. 그는 고문에 몸이 허약해질대로 허약했습니다만 왜놈들은 그대로 방치해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도주는 “왜 죄없는 신도들을 죽이느냐?”고 항의를 하기도 했고 혼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단식으로 대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왜 놈들은 여전히 고문을 가하며 만주로 이민을 가겠느냐, 금강대도에서 손을 떼겠느냐, 아니면 천황을 섬기겠느냐고 윽박 질렀습니다. 도주는 빨리 재판에 붙여 죽이든 살리든 하라고 요구했읍니다만 그때마다 그들은 너희들은 그대로 죽일 수 없다. 재판에 넘기지 않고 유치장 감방에 썩혀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들은 한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석 달이 가도 기소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가고 여름이 왔습니다. 감방에서 죽어나가는 신도들의 수효는 더 늘어 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남아있던 신도들의 가족들이 매일 대전경찰서에 몰려와 도주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그래도 일제의 자세는 누그러지지않았으며 태평양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당시 옥살이를 했던 유치흥옹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때 감방에서 숨을 거둔 사람은 김창희 외 10여명이나 되었다. 이처럼 사망자가 속출하자 아무리 일제지만 비등하는 여론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공주법원의 곤오도 검사는 상당히 동정심이 있는 양심적인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피의자들을 장기간 감금시키고 기소를 하지 않느냐? 계속 사망자가 생기는 문제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이냐?” 고 경찰서장에게 기소를 재촉했다. 이에 경찰서장은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아 기소를 못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곤도오 검사는 직권으로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위협 결국 9개월만에 공주법원에 기소를 하였다.(일제강점기에 검사도 법원에 있었음)

곤도오 검사는 경찰과는 달리 금강대도 구속자들에게 상당히 온건하게 대했다. 곤오도 검사는 피고들을 신문할 때마다 “당신들의 입장을 이해한다. 따라서 내 손으로 당신들을 처벌한다는 것도 괴롭다. 그러니 당분간 침묵이라도 지켜 줄수 없겠는가?” 하고 종용했다. 그러나 도주는 “나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신앙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소. 우리는 신앙에 따라 행동하고 말할 따름이요”하고 거절했다. 그래도 곤도오 검사는 연일 잇달아 계속되는 신도들의 도주 석방운동과 사망자가 속출하게 되자 기소를 하면서 1942년 8월 병보석으로 이성직 도주를 일단 석방했다.

석방하면서 일제는 도주의 주거를 조치원읍 신흥동으로 제한했으며 금천리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도주가 거처하는 신흥동엔 형사를 배치시켜 모든 행동을 감시케하고 신도들의 출입을 금했다.

도주의 병보석과 때를 같이하여 일제는 금강대도의 본전을 비롯 모든 주요 건물을 철거키로 하고 공작을 벌였다. 그들은 우선 도주에게 일체의 모든 건물을 충남도나 총독부에 기증 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이와 같은 요구가 수락 될리 만무였다. 금강대도 건물의 무상 기증을 도주가 거부하자 경찰이 나서서 신도들을 위협 기증서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했다.

신도들을 잡아다 다시 고문을 가했으며 건물 기증서에 지장을 찍게 했다. 그들을 고문으로 정신을 잃게 만든 후 지장을 찍은 기증서를 들고 금천리에 트럭을 끌고 나타났다. 신도들은 그와 같은 문서를 무효라고 주장, 건물 철거를 반대하며 농성을 벌였지만 경찰은 물론 대부분의 작업부들이 깡패들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해야만했다.

실로 건물 철거가 강행되는 동안 금천리 마을은 온 통 울음바다였다. 충남도는 폭력과 불법으로 철거한 이들 건물들을 충남의 갑부이며 당시 중추원 참의였던 김갑순(金甲淳)이 경매로 매입하였다.

김도현 종심원장은 “뜯어간 건물을 사들인 김갑순씨는 이것으로 유성호텔 건물을 짓기도 했는데 6.25때 폭격으로 불타 버리고 지금은 유성호텔 신관 뒤 뜰에 누각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하고 증언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당시 금강대도의 건물이 얼마나 크고 웅대 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신도들을 잡아 가두고 많은 사람들을 감방에서 죽게 만드는가 하면 만주로 쫒아 내려고 했고 마지막엔 모든 건물을 헐어 버리는 탄압이 가해진 금강대도는 밀물처럼 몰아치는 그 고통과 수난을 견디며 1945년 8. 15광복을 맞았다.

금강대도의 시련은 해방으로 끝나지 않았다. 6.25가 발발하자 인민군들이 이곳을 점령하고는 단군 영정을 떼어 버리도록 요구한 것이다.

물론 도주는 이와 같은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그러자 한번은 인민군 장교가 나타나서 단군 영정에 총을 들이대는 것이었다. 이에 이성직 도주는 “아무리 빨갱이라 해도 어떻게 단군을 거부하느냐? 단군 영정에 총을 쏘려면 차라리 그 총구를 나에게 돌려라” 하고 총부리를 가로 막았다.

이렇게 해서 적치(赤治) 90일간 금강대도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으며 1957년 5월 28일, 일제하에서의 모진 옥살이 등으로 45세에 타계한 제 2대 도주 뒤를 이어 1962년 2월 15일 신도들의 총의에 의해 이일규(李一珪) 현도주가 제 3대도주로 추대됐다.

제2대 도주의 장남으로서 성균관 대학 동양 철학과에서 공부하면서 그의 종교를 학리적으로 정립하는데 전념했던 이일규 3대 도주는 도사편찬사업, 위생사업, 의성장학회사업, 전화사업, 개도백년 사업 등 많은 사업을 벌여 왔으며 인조 진주가공, 약초재배 등 전국 36만 신도들의 경제. 문화적 생활 향상에도 정열을 쏟고 있다.

 

 


                                                       (책자 겉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