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중시대, 남녀평등의 연화대도를 반석에 올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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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청학 이성직 제2대 도주로 추대돼 ‘총관장’ 직책 맡아
청학은 어린 시절 효성이 지극했고 선하지 못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겐 비록 어린 나이지만 바른 말로써 경계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특히 12세 때는 외숙의 상사를 당하여 조사를 지어 말하기를 “사람이 생(生)하면 사(死)가 있고, 사(死)하면 생(生)이 있는 것은 모두 일신(一神)의 거래이니, 영령께서는 세간의 미진한 신원(伸願)을 말하지 마소서. 사람에게 장생이 비록 좋다하나 신계의 무위지락(無爲之樂)만 못한 고로 사람이 모두 죽어서 극락가기를 원하는 것이니, 천명을 따라 신계에 돌아가면 영원히 신선이 되시고 다시는 겁(劫)에 떨어지지 마소서.”라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27년 어머니 자암이 돌아가시자 15세의 나이로 여러 도인들과 함께 막을 짓고 3년간 중복으로 시묘했고 16세 때 송파(松波) 민진호(閔震鎬)와 정송덕(丁松德)의 둘째 딸인 민보단(閔寶丹 1913~1959)과 결혼했다. 보단은 충북 청원군 강서면 용정리에서 태어났으며 뒷날 연화대도의 제2대 도주가 되었다. 1927년 아버지 토암에게 청하여 서재를 짓고 이름을 ‘문창재(文昌齋)’라고 했다. 봉추(峰秋) 유치흥(兪致興)을 강사로 세워 학도를 모집하니 인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학 또한 여기에 나가 글을 읽었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스스로 세상 이치를 깨우쳐 조목조목 물으니, 유치흥이 말하기를 ‘이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타고난 재능이요. 과연 성인의 자품(姿稟)이로다’고 하며 감탄했다. 이후 청학이 토암의 대를 이어 제2대 도주(道主)에 오르자 도리어 그의 제자가 되어 일생을 신봉하였다.
1934년 3월에 충남도청 광장에서 선도포덕(宣道布德)과 민족정신 앙양을 위해 태극기와 도기를 앞세워 강연회를 열려고 했으나 밀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11월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으로 고통 받았던 제1대 도주 토암이 운명하자 청학은 부막을 짓고 3년간 중복으로 시묘했다. 1935년 구한말 참서관을 지낸 설산(雪山) 오진(吳進)이 일본승 산본(山本)과 함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니 청학이 말하기를 “내가 별다른 방도가 없고, 다만 도덕일 따름이니 두 분은 한번 연구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수계(受戒)한 후 며칠을 묵으면서 보니, 청학 이하 여러 도인들이 매일 아침 성전참배와 성묘의례를 행하고, 송경, 염불하는 정성을 보고는 감탄하여 “현재 윤상(倫常)이 무너진 이 세상에 이와 같은 정성과 성덕은 처음 보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산본은 일본 불교에 일찍이 귀의한 몸으로서 다시 금강도에 입도하지 못함을 탄식하며 돌아가고, 오진은 그 자리에서 입도하여 금강도인이 됐다. 25세 되던 1937년(개도 64년) 김창희(金暢喜)와 임태철(林泰喆) 등의 주도로 도주 추대에 대한 논의를 한 결과, 과거 토암의 성훈에 입각하여 청학과 보단을 제2대 도주로 받을 것을 결의했다. 도인들의 추대를 받은 청학은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우선 총관장(總管長)이라는 직책을 맡아 실무를 처리하고, 1938년 제자들에 의해 정법사(正法師) 명법사(明法師)로 봉대(奉戴)됨으로써 마침내 천명에 임하게 됐다. 사위(師位)에 오른 후 청학은 8개 선화부(宣化部)의 조직을 정비하는 등 포교에 힘을 기울였다.
일본 승려 진해양양(眞海良陽)의 안내로 진언종총본부(眞言宗總本部) 고야산(古野山) 금강봉사(金剛峰寺)에 도착하여 일본 불교의 대표자 수련과정인 관정식(灌頂式)에 참여했다. 그들이 하루는 청학을 선실로 안내하여 화두를 정하고 참선으로 청학의 법력을 시험하려 했다. 이에 청학은 비록 젊은 나이지만, 무릎 꿇은 상태에서 선정에 들어 12시간 동안이나 정좌하되, 법신이 오히려 원용(圓融)하여 금강삼매에 이르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모든 일본 승려들이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청학은 200여 승려들에게 각각 선시(禪詩)를 내려주며 “일본이 비록 불교문화가 융성하다 하여 과시하고자 하나,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전해 준 것이니, 그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될 것”이라고 경계하니, 일본 승려들은 청학을 일본 불교 진언종(眞言宗) 창시자인 홍법대사(弘法大師)의 후신이라 일컬으며 경앙(敬仰)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예(禮)로써 몸을 바르게 하고, 악(樂)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니, 만일 예악이 없다면 어찌 인의(仁義)가 도덕에 화순(和順)케 되리오’하고는 태극무(太極舞). 무극무(無極舞), 봉무(鳳舞), 학무(鶴舞) 등 자연만상의 이치에 맞는 여러 가지 가무법을 가르쳐 주고 이를 ‘흥기도덕가(興起道德歌)’의 가사내용에 따라 춤추게 했다. 1941년 2월에 여성도인들의 수도, 포교를 위해 ‘연화도 총본부’ 간판을 걸고 ‘금강도 총본부’와 함께 집무하게 했다. 7월에는 제1대 도주 대성사부모가 내려준 30여권의 ‘대성경(大聖經)’을 비밀리에 감추게 했다. 이때는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세가 날로 치열해지던 때였으므로, 우리 조선에 대한 사상 통제와 인력 징발이 더욱 심해져 가는 시기였다. 이에 청학은 감당키 어려운 큰 변을 당할 것을 예견하고 정태용(鄭泰鎔) 최기양(崔岐陽) 등에게 철궤 6개를 만들게 했다.
마침내 10월 19일 일경 수백 명이 돌연히 법당에 난입하여 청학 이하 중요 역직원 53명을 강제 연행하는 변란을 겪게 된다. 그동안 수차례 일본 불교와 합병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했으며 더욱이 단군을 숭상하고 민족정신을 앙양하는 등의 활동을 보이자, 일제는 금강대도의 말살을 계획하고, 이미 한 달 전부터 치밀한 작전을 짠 뒤 이날 갑자기 금강대도 본부를 급습한 것이다. 이 해(신사년)의 변란에 대해 금강대도에서는 “신사사변(辛巳事變)”이라고 한다. 금강대도 ‘건곤부모님’의 의미는 무엇인가 건곤부모라 함은 우주(天地)와 인간을 낳고 기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우주(天地) 한 가족의 아버지·어머니라는 것이다. 건곤부모님은 왜 인간 세계에 나오셨는가? 우선, 건곤부모님은 이 우주와 인간을 직접 낳으셨기에, 타락해 가는 인류와 멸망해가는 우주를 그냥 두고 보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건곤부모님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만물의 영장으로 존중하시기 때문에 인간을 통해서 우주의 화평을 이루시려고 했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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