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대도 .도덕으로 개화되는 세상.

특별기획 연재

天·地·人의 우주적 화합, 대성적 시대가 열리다

인월산(仁月山) 2015. 7. 15. 12:25

天·地·人의 우주적 화합, 대성적 시대가 열리다
2010년 07월 09일 (금) 16:44:11 충북인뉴스 cbi@cbinews.co.kr

1906년 창도주 토암 이승여 ‘건곤부모’ 종교적 체험
1910년 금강산 떠나 충청도 계룡산으로 ‘남천포덕’
1921년 ‘상해 임정 군자금 보냈다’ 청주경찰 연행·고문

   
▲ 지난 3월 금강대도총본원에서 거행된 제4대 도주 금강대도용화교주 대종법사 이법산, 연화대도용화교주 대종덕사 양도향 양위의 취위식 장면.
“천지는 부모라 하고 일월은 형제라 하며 성신(星辰)은 붕우라 하였으니 천하지인이 누가 형제 아니 되며 누가 붕우(朋友) 아니 되리?” 금강대도의 제1대 도주인 토암(土庵) 이승여(李承如 1874~1934)의 ‘도덕가’ 중 한 구절이다. 이렇게 금강대도는 천지인(天地人) 삼재의 전 우주적 화합과 인간의 도덕적 자각을 목표로 하여 시작됐다.

금강대도의 역사는 토암의 출생일인 서기 1874년(개도 원년) 5월 19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금강대도에서 토암을 생이지지(生而知之)의 만고(萬古) 대성인으로 추앙하여 개도 원년을 토암의 출생연도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010년 현재 137년의 도기(道紀)를 기록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4기로 구분할 수가 있다.

즉, 창도주이며 제1대 도주인 토암의 생애에 대한 대성적(大聖蹟)과, 제2대 도주인 청학(靑鶴) 이성직(李成稙 1913~1957)의 생애에 대한 도성적(道聖蹟), 제3대 도주인 월란(月鸞) 이일규(李一珪 1934~2004)의 생애에 대한 덕성적(德聖蹟)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지난 3월 취위식을 거행한 제4대 도주 법산(法山) 이경구(李敬求 1961~)의 '태극적 개화시대'를 제4기로 구분할 수 있다.

   
▲ 금강산의 체험
금강대도에서는 열반하신 3대의 도주를 ‘대도덕성사건곤부모’님이라 하여 삼위일체의 건곤부모로 신앙하고 있다. 여기에서 제1대 도주인 대성사건곤부모님은 도의 씨앗을 뿌렸고, 제2대 도주인 도성사건곤부모님은 도의 씨앗을 가꾸었으며, 제3대 도주인 덕성사건곤부모님은 도의 열매를 가려 거둬들이는 역할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4대 도주인 용화교주 대종법사. 대종덕사는 3대 도주님들의 시기를 무극적 은도시대라 하여 금강대도의 창도기로 설명하며 이제 1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을 태극적 개화시대라 하여 금강대도가 세상에 크게 드러나 대도덕성사건곤부모님의 가르침으로 천하중생이 구제되어 대동세계가 되는 시기라고 천명하였다.

목은 이색 17세손, 유·불·선 와해 우려
금강대도의 제1대 도주이신 토암 이승여는 외금강 유역인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에서 탄강하셨다. 부친은 백산(白山) 이문유로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목은 이색(李穡)의 17세손으로서 6대조로부터 통천에 거주하였다. 그 부인인 전백전(全白田)이 하루는 꿈에 옥황상제가 나타나 하얀 솜을 많이 주기에 공경하여 품에 안고 그 달로부터 잉태하여 토암을 낳게 되었다.

   
▲ 남천포덕의 길
그는 어려서 상필(尙弼)로 불렸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배움에 나아가지 못하고 나무하는 일로 업을 삼아야했다. 모진 가난과 고통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였지만, 늘 남을 위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의리를 행함에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특히 조그마한 벌레나 미물이라도 불쌍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 구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18세가 되면서부터 당시의 어수선한 세계정세와 고통 받는 민중들의 고달픈 삶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많았으며, 유(儒) 불(佛) 선(仙) 등 기성종교의 와해와 서학(西學)의 위협 속에서 윤리, 도덕이 점점 타락해 감을 크게 한탄하였다.

그는 24세 되던 1897년 상산(祥山) 서상의(徐相儀)와 오상전(吳祥田)의 맏딸인 서자암(徐慈菴 1884~1927)과 결혼하였다. 자암은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 석도(石島)에서 태어났으며, 뒷날 연화대도의 제1대 도주가 되었다.

금강대도에서는 토암이 천상옥경(天上玉京)의 삼청옥황금궐(三淸玉皇金闕) 안에 있는 금강궁의 태청도덕천존(太淸道德天尊)이었으며 자암은 태을구고천존(太乙救苦天尊)이었는데, 오중(午中)시대를 맞이하여 건곤부모로 하강하였다고 한다. 또한 토암을 만법교주금강대불(萬法敎主金剛大佛), 자암을 만법교주연화대불(萬法敎主蓮華大佛)이라고 부르면서 미륵대불의 화신으로 믿고 있다.

결혼 후 생계가 더욱 어려운 가운데서도, 홀로 세상 이치를 궁구하고 제중(濟衆)의 방도를 모색하던 토암은 33세 되던 1906년 마침내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일종의 종교적 체험을 겪게 된다. 2월 15일 토암은 아우와 더불어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가게 되었다.

나무를 한 짐 해서 지고 산을 내려오다가 길옆에서 잠깐 쉬던 중에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이윽고 천지가 맑아지고 일성(日星)이 조요(照耀)하여 신기(神氣)가 혼혼(昏昏)하고, 육합(六合-천지와 사방)이 돈연히 열리면서 우주가 한눈에 펼쳐졌다.

이때 글을 불러 가로되 “현우(顯宇-토암의 字) 윤세황(允世皇) 인개지풍수(人開地風水)”라 하고, 또 가로되 “윤사월지망간(閏四月之望間)에 평생덕지심착(平生德之尋鑿)이라. 의외천리객(意外千里客)이요, 명출고명전(名出高名傳)이라. 장원급제제일(壯元及第第一)이요, 부귀공명특등(富貴功名特等)이라. 시시우봉춘(是時又逢春)하니, 만인개앙시(滿人皆仰視)라”고 하였다.

여기서 앞의 글은 자신이 건곤부모로서 새로운 우주를 연다는 사명을 말한 것이고, 뒤의 글은 자신이 남쪽 충청도로 거처를 옮겨서 도덕문명의 봄을 여는 만인의 스승이 된다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남덕포덕 계시 받고 제자 30명과 충청도 이주
그 후 자신은 금강도사(金剛道師)라 하고 자암은 연화도사(蓮華道師)라 하면서 포덕에 나선 토암은 먼저 이웃에 살던 백련(白蓮) 정태용(鄭泰鎔)을 첫 제자로 삼고, 남쪽으로 포덕의 거점을 옮길 준비를 하게 된다. 이때에 토암은 직접 수천 명의 성명을 한 책에 써놓고는 “내 장차 남방에 가서 이 사람들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리라”고 하고는 곧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수차례에 걸쳐 남천(南遷)의 길을 떠났다가 되돌아오곤 하던 토암은 마침내 37세 되던 1910년 3월 15일 가족과 제자 30여명을 데리고 길을 떠나 4월 8일 계룡산 신도안 백암동에 도착하게 되었다. 거기서 백남(白南) 김도명(金道明)을 만나 제자로 삼고, 그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아 적극적인 포교를 시작했다. 따라서 2010년 올해는 금강대도 남천포덕 10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충청도에 자리를 잡게 된 토암은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천지께서 세상 만물을 낳으심에 사람보다 귀하고 영특한 것이 없으니, 그것은 사람에게 윤리와 도덕이 있기 때문이다. 범과 이리도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고, 벌·개미의 군신(君臣), 비둘기의 부부(夫婦), 기러기의 형제(兄弟), 꾀꼬리의 붕우(朋友)는 모두 금수로되 윤리가 있는 것이니, 하물며 사람으로서 윤리와 도덕이 없으면 금수만도 못한 것이니라. 근래에 인류가 금수화하여 상하가 없어지고 예의가 없어짐은 근본적으로 성인의 도(道)가 밝지 못한 때문이니, 유가(儒家)의 무리들은 한낫 글만 읽고 실행이 없으며, 불가(佛家)의 무리들은 다만 의식만 있고 자비(慈悲)한 마음이 없으며, 선가(仙家)의 무리들은 오로지 기괴한 것만 숭상하고 수련하는 공부가 없어서, 스스로 높은 체 만 하고 서로서로 부딪쳐 헐뜯고 싸우는 살벌함을 자아내고 있으니 이 모두 성인들께 큰 죄인이라. 하늘에 계신 성인들의 영혼이 어찌 혁연히 진노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토암의 도덕이 근본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인간의 ‘심성배합’과 도덕의 ‘실천궁행’을 인간 완성의 요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말세의 재앙이 인간 스스로의 도덕적 타락에서 온다고 보았고, 그것의 상당한 책임은 유, 불, 선 등 기성종교의 타락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기성 종교의 이러한 중생구제력의 상실을 그들의 운도가 다했기 때문이라고 본 토암은 유불선 본래의 면목을 회복시켜 도덕적 실천을 고무하기 위해 자신이 설파한 후천시대의 진종(眞宗)인 금강대도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

신도설교와 일제탄압에 의한 은도방편
토암은 포덕에 있어서 제자들의 근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방편을 썼다. 즉, 식자가 있는 자들을 위해서는 ‘교유문(敎諭文)’ 을 비롯, 한문으로 된 여러 경전을 스스로 저술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후세에 남겼고, 식자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비유를 들어 구전심수(口傳心授)하는 방법을 썼으며, 의술을 통한 방편적 교화도 시행했다.

그리하여 그의 주변에는 유학과 불전 등에 밝은 식자층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글자를 전혀 모르는 많은 서민 대중들이 제가가 되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반상(班常)의 신분제도를 부정했고, 남녀의 차별을 반대했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는 양반과 상인,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한 자리에 앉아 수도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남천포덕 한 지 1년만에 벌써 금강대도의 제자는 수천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금강대도의 도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나자 일본 경찰들의 요시찰 대상이 됐고 1911년 감시의 눈을 피해 공주군 반포면 남산소로 거처를 옮겼고, 거기서 1년 만에 다시 황적동(黃寂洞)으로 이주하였다. 1913년 5월 5일, 성자(聖子) 성직(成稙)을 황적동에서 낳았다. 이때는 일제의 탄압에 의한 은도(隱道)의 시기였기 때문에 경제적 궁핍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자암과 함께 후원에 단을 설치하고, 1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창생제도의 일념으로 천제를 베풀었다. 또한 자암은 “한 집안과 나라의 흥망성쇠, 자손의 교육여부는 모두 우리 부녀자의 손에 달려 있으니 너희들은 아무쪼록 육친(六親-父子, 夫婦, 兄弟)을 화합하고 종족을 화목하며 이웃 사람을 정답게 사귀어서 부인의 행실을 지키어라. 부인이 가장 경계할 바는 사치함과 게으름이며, 가장 지킬 바는 근검과 정조이니, 만일 그렇지 못하면 금수와 같음을 면치 못하고, 한 집안을 쇠하고 망하게 하는 단서가 되나니 간절히 경계할 지니라”하여 특히 부녀자의 가르침에 심혈을 기울였다.

토암은 1914년 봄에 ‘교유문’을 저술하여 제자들에게 내려 주었고, 1916년에는 대덕군 구즉면 신동리 녹골로 거처를 다시 옮겼다. 이때 유불선 삼합의 진리와 심성수련의 요목들을 정리한 ‘명교장(明敎章)’이란 글을 내려주었다.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 금강대도 위기맞아
총독부 사찰령, 일본 불교의 한국 침투 본격화

남천포덕 이후 급속하게 도세가 확장되자 이를 경계한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근거없는 죄목을 씌워 토암을 헌병대로 강제 연행, 일주일 동안이나 구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21년 9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냈다는 이유로 청주경찰서에 강제 연행 당했다. 당시 토암은 모진 고문을 당했고 김도명 등 십여 명의 제자들이 차례로 호출당해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10월에는 다시 대전 검사국에 불려가 여러 차례 신문을 받았으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20여일 만에 풀려났다.

민족종교인 금강대도의 맥을 끊기 위한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자 토암은 임시적인 은도방편으로 일본 불교의 일파인 ‘진종동붕교(眞宗同朋敎)’의 간판을 내걸게 된다. 1922년 7월 논산군 두마면 석교리 신도안에 법당을 세웠고 당시 일본 승려 부전(釜田)이 와서 감시한곤 했다.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일본 불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었던 한국불교와 신종교는 일제의 강압적인 법령으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일제하에서 제정된 법령은 세 가지였다. 그 첫 번째가 1906년 통감부령 45호로 시행된 ‘종교의 선교에 관한 규칙’이며, 두 번째가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이며, 세 번째가 1915년 제정된 ‘신사사원규칙·포교규칙’이었다.

일제가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제일 먼저 제정한 법령은 통감부령(統監府令) 제45호로 6개조의 ‘종교의 선교에 관한 규칙’이었다. 이 규칙은 일본불교의 한국진출에 대한 길을 텄고 일본 불교의 각 종파는 서로 앞을 다투어 한국사원 관리를 통감부에 신청하였다. 그런 법령에 이어 제정된 것이 사찰령이었다.

한일합방으로 정치적 복속을 꾀한 일제는 1911년 조선총독부 제령 7호로 사찰령을 반포해 한국의 종교시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찰 주지 임면권을 총독부가 장악하고 사찰의 폐합·이전·재정의 처분 등 각가지 규제로 한국불교를 지배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총독부가 1915년 제정한 신사사원규칙·포교규칙은 한국에 있어 신도(神道)·불교(佛敎)·기독교(基督敎) 등 주요 종교에 대한 포교문제를 간섭하기 위해 만들어져 세세한 문제에까지 총독의 감독권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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