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사부모님께옵서 33세에 (개도 33년 1906년)에 득도하신 이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에서 계룡산 백암동으로 남천포덕하시어 도덕을 설파하시며 제자를 얻으시고 금강대도를 창도하시는 과정에서 교화하신 말씀을 수집 편집하여 성훈통고로 출간하여 인류중생 구제의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1-8 -1-2 봉추 유치홍
두어 달 후에 성사께서 신도안(현 계룡시)에서 총회를 여시어 ‘동붕교’ 간판을 걸으시고 김정묵을 주간으로 삼으심에 일본 중 부전(釜田)이라는 자가 자주 왕래하는 모양이라.
그 시절 나(봉추)는 청주 김소당 선생이 배일자정(排日自靖 :일본을 배척하며 자신의 도리를 지킴)한 일을 생각하고, 불쾌한 마음이 들어 글을 써서 동붕교회에 나의 의사를 전하고 조용히 물러 나온지라.
4년 후 정묘년(개도 54년 1927년) 3월 초에 오준수(호 한곡)를 은암에서 만나서 하룻밤을 담론하고 3월 15일 계룡산 동학사 춘절 향사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차로 성사님께 나가 뵐 것을 약속하니라.
기약한 날이 되어 일가 사람 인준과 함께 감성리(현 세종시 금남면)에 오니, 때마침 오준수가 이미 와서 기다리다가 반갑게 맞이하며 말하기를 “약속을 지킬 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특별히 와서 기다렸소” 하여, 내가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감사하며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을 이같이 멀리하지 않으시니 도리어 절실히 미안할 뿐이라, 오늘은 숙모전(肅慕殿) 향사 일이라 안 가볼 수 없으니, 내일이나 모레 사이 돌아오는 길에 어김없이 찾아뵐 것이니 그리아시오.”
이튿날 돌아오는 길에 금천(현 세종시 금남면)이르러서 또 오준수를 만나니라. 그분의 안내로 성사님을 뵈올 새, 밤에 안으로 들어가니 갓을 쓰시고 큰 띠를 매시고 점잖으신 풍채로 행하심이 위엄이 있고 절도가 있으신지라.
존전에 나가 배알하니 성사께옵서 말씀하시기를 “그 절하는 모습을 보니 필시 사문(유도)에 종사하는 사람이로구만” 하시고 흔연히 하교하시기를 “오늘날 학자들이 비록 공자 배우기를 소원한다고 하나 그 마음인즉 감히 공자를 배우지 못하고 다만 정자와 주자에 머물러 있나니 어찌 옳겠는가.
한 가정의 일로 논하되 자식이 아버지보다 낫다 하면 그 아버지가 기뻐하거니, 도덕가(道德家)에서 어찌 그러하지 않으리오. 전 성인보다 낫다고 하면 전 성인이 기뻐하거늘 오늘날 학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공성이 영혼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있다면 반드시 노하여 기뻐하지 않으리라” 하실새,
내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가르침을 받음에 황연히 가슴이 갑자기 열리고 마음이 상쾌해지더니 부지 중에 눈이 활짝 열리는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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