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대도 .도덕으로 개화되는 세상.

도성훈통고 (道聖訓通攷)/수행기(修行記). 信편

별다른 천지요, 인간세계가 아니었다

인월산(仁月山) 2021. 7. 29. 14:27

일제식민지, 6. 25 전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修行)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8

김상성(호 용지)이 강원도 지역에 옮겨 산지 19살이 되던 해에

(1) 고향으로부터 형의 서신에 부모를 모시고 돌아오라 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21살의 해 6월에 소집영장이 나와 군대에 들어가서 청진에 진입하여 아비규환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치열한 전투에서 오른쪽 갈비 부위와 왼쪽 팔뚝에 총으로 관통상을 당하여 천신만고 끝에 군 병원에서 응급치료하고 사지를 뚫고 남하하여 청주에 도착해서 경비대에 들어가서 수속 절차를 갖추고 고향에 돌아오니 부모님과 가족들의 눈물바다가 집을 덮었으나 집에 있으면서 치료하여 상처가 거의 나았다.

음력 11월 초에 셋째 형으로 더불어 만승면 죽현리 고모 김월음 댁에 함께 가서 고모로 더불어 근동에 사는 이대경씨 댁에 가니 마침 그때에 동생 이대철과 고종형이 늦게 들어왔다.

잠깐 인사가 있었던 후에 고모님이 말하기를 “큰댁에 사부님이 안녕하신가?”

형이 말하기를 “도성사부님은 조치원에 행차하시어 배알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평소 듣지 못하던 말을 듣고서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너도 차차 알 것이며 오래지 않아 뵐 것”이라 하여 더욱 이상한 마음이 풀리지 아니하였다.

고종형이 말하기를 “금번에 금천에 가서 뵈니 도덕가를 부르면서 법으로 춤을 춤이 지금 성행함이라” 하고 베낀 도덕가를 내보여서 나는 즉시 그 글을 베끼고 몇 번 읽고서 기뻐하였다.

며칠 후 귀가하니 형이 말하기를 “금천에 가서 너를 신입하고 금일 왔으니 네 몸이 쾌하면 12월 25일 총회에 함께 갈 것이라” 하여 조급한 마음이 세 번 가을이 지나는 것 같더라.

날이 가까워 박순배로 더불어 청주에 이르러 도보로 부강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백중재에 이르러 밤이 이미 깊음에 제2선화부에 도착하여 쉬고 이튿날 청운교 근처 큰댁에 가니 도성사부님께서 흰 의관으로 계단에 서서 분부를 하시는데 별다른 천지요, 인간세계가 아니었다.

대도를 처음 보고 돌아와서 생각하니 나는 착한 사람이 될 것을 원하여 항상 천지신명께 기도한 고로 저절로 대성인을 만나 부상당한 곳이 구름 걷힌 푸른 하늘처럼 나았고 크게 원하는 성취가 눈앞에 있는 것과 같음이었다.

다음번 총회 시마다 금천에 왕래하고 개도 74(1947)년 11월로부터 성재 기간이 비로소 열림에 입재하여 공부를 하고 6.25전쟁을 금천에서 지나고 개도79(1952)년 이른 봄에 금천으로 이사하여 대성전 봉건사업이 시작되어 1개월을 헌신하고 여러 가지 사업에 임하니 이때 제2본원 자리(현 계란봉 곁)에 사택이 봉건되었다.

81(1954)년 11월경에 영대리 최 아무개로부터 화목을 사 와서 경위를 사부님께 고달 드렸다.

이튿날 10여 명의 도인을 동원하여 사택으로 반입하는 고로 점심 준비 차 잠깐 큰댁으로 들어왔다가 현장에 도착하니 인부들이 말하기를 산 주인이 이르기를 “연료 20짐은 다른 장소에 운반하고 처음에 약속하였던 석 짐도 절대로 주지 않는다” 고 하여 오운 선배(김종식)로 더불어 언쟁이 있었다고 할 새 내가 그 말을 듣고 주인을 만나 항의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어떤 사람이 내 심정을 거슬려서 분이 풀리지 않거늘 또 성질을 돋우느냐?” 하고 언덕 위로부터 급히 오더니 긴 담뱃대로써 직접 찔러서 앞니가 부러져 떨어져서 입에서 피가 나와서 내가 말하기를 “현재 이가 부러졌다” 하니 주인은 더욱 노기를 띠고서 가슴을 잡고 흔듦에 나는 이 일로 인하여 사부님의 심려를 생각하여 그 사람에게 몸을 맡기니 모든 사람이 경위를 분석하여 중지하였다.

운반하는 일이 다 함에 이 일을 염려하여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몸을 조심하여 귀가하였더니 저녁에 김도현(취사)이 제반 상황을 사부님께 고달하여 불려 들어가니 말씀하시기를 “용지야 오늘 치아가 부러졌다며 어느 곳인가?” 하시고

촛불을 댕겨 보실새 사모님께서도 “얼마나 상했느냐? 여기 와서 일 하는 것도 퍽 애석하거늘 소중한 치아가 부러졌으니 나의 이가 부러진 것 같이 억울하다” 하시고 측은한 마음을 감추지 아니하셨다.

사부님이 하문하시어 자초지종을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노인이 젊은이를 먼저 치는 것이 도리이냐? 노인이 젊은이를 치는 것과 젊음 사람이 노인을 치는 것도 다 도리에 어긋나니 명일에 취사로 더불어 가서 잘 해결하라.” 하사

이튿날 내가 산 주인집에 가서 대화를 나누는 중에 김도현, 강화석이 들어와서 한참 대화함과 과실의 책임을 받고 다만 내 말을 따라 치과병원 치료에 그칠 것을 약속하였다.

뒷날 그 사람으로 더불어 대전에 가서 일주일간 치료하고 들어와 배알하니 사부님이 이를 보시고 다행함으로 생각하시었다. 82(1955)년 10월 중순에 갑자기 날이 추웠다. 큰댁 김장 무가 제2시전 앞 밭에 심겨져 있었다.

날이 저물어 사부님이 동해를 염려하시어 그 무 뽑을 것을 명령하시어 나 혼자 밭에 가서 작업을 부지런히 완료하고 뒤를 돌아보니 사부님이 행차하시어 바라보시었다. 최기만(호 용강)이 사부님의 분부로써 전의호(백촌)를 데려와서 합심하여 큰댁에 반입하니 그날 작업은 모름지기 사부님의 감화로써 쉽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