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대도 .도덕으로 개화되는 세상.

대성훈통고(大聖訓通攷)/내, 외편( 內,外編)

대성사모님께서 승하하시니(5)

인월산(仁月山) 2022. 1. 31. 05:02

「대성사부모님께옵서 33세에 (개도 33년 1906년)에 득도하신 이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에서 계룡산 백암동으로 남천포덕하시어 도덕을 설파하시며 제자를 얻으시고   금강대도를 창도하시는 과정에서 교화하신 말씀을 수집 편집하여 성훈통고로 출간하여 인류중생 구제의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1-1-1 정태용(호 백련)이 

신유년(개도48년 1921년) 9월 7일에 성사께옵서 또 다른 사람의 무고를 당하여 청주 경찰서에 갇히게 되시니, 태용 또한 모시고 가서 함께 갇혀 심한 고문의 형벌을 받고, 10월 5일에 검사국으로 넘어가서 태용은 나흘 먼저 석방되니라. 태용이 매일 형무소에 출입하며 사부님을 뵙옵고 또 변호사 김병하에게 위촉하여 성사님을 변호하게 하니 수당금이 150원이라. 10월 19일에 비로소 무사히 석방되어 환택하시다.

 

임술년(개도49년 1922년) 8월에 신도안의 이준명이 와서 성사께 고하기를 “작금의 세태가 과연 전일과 다른즉 전과 같이 남모르게 살기가 진실로 어려움이 있으니, 신도안의 김정묵과 협의하여 진종교로 돌아감이 좋을 듯 하옵니다. ” 하거늘, 태용이 명을 받들고 신도에 가서 정묵을 보고 협의하여 함께 와서 대성사부님을 뵈니라. 성사께옵서 드디어 진종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시고 곧 오근수, 오희운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진종교로 갈 터이니 너희들이 가고 아니 가는 것은 임의로 하라” 하시니, 두 사람이 모두 명령을 좇아 뜻을 결정하니라.

 

이해(임술년 1922년) 11월 25일에 성사께옵서 신도안에 행차하시사 비로소 대총회를 여시고 동붕교 간판을 걸으시니 총회에 참가한 자가 수천 명이라.

김정묵을 주간으로 삼아서 사무를 정리하게 하고 성사께옵서 항상 여기에서 설법하시니, 법당이 다섯 칸 두 줄 집이요, 또한 교육부와 치료부의 두 부서를 두시니라.

 

계해년(개도50년 1923년)에 연기군 금남면 금천에 터를 정하시사 사택과 법당을 세우시니, 이로부터 무릇 건축 사업이 있을 때마다 태용이 항상 주간하니라.

 

갑자년(개도51년 1924년) 8월에 성사께옵서 하교하시기를 “신도안에 대신 가거라” 하시다. 태용이 명령을 받들어 강노암과 함께 신도안에 갔다가, 이듬해 을축년 10월에 노암은 금천으로 돌아오고 태용은 병인년(개도53년 1926년) 10월에 명령을 받들어 금천에 들어오니라.

 

정묘년(개도54년 1927년) 12월 25일에 대성사모님께서 승하하시니, 그때 태용이 오희운과 함께 명령을 받들고 조치원 경찰서에 이르러 대도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신문을 당하고 저물게 돌아온 고로 미처 임종하지 못하니 죄송함을 어찌 형언하리오.남녀 제자가 부모 상사와 같이 삼년 중복을 함에 태용도 또한 삼년 중복을 마치니라.

 

무진년(개도 55년 1928년) 3월에 성사께옵서 하교하시기를 “장차 성묘(사당집)를 세우리니 네가 목재를 구해 오너라.” 드디어 명령을 받들고 수원에 가서 목재를 사서 운반해오고 성묘 건축하는 일을 주간하니라.

8월에 금강도 종리사의 책임을 배수하고, 10월에 대성사모님을 계란봉 위간좌에 안장하다.

기사년(개도56년 1929년) 2월에 수원에 가서 목재를 구입하여 운반해와 백옥사 건축일을 주간하고,

11월에 금강도 고문의 책임을 배수하니라.

 

기사년(개도56년 1929년) 2월에 학몽사 건축 재목을 구하려고 파주에 가서 한 달여 만에 비로소 구매하여 운반함에 오진수와 함께 역전에서 만나 경성역에 이르니 마침 박람회가 개최된 때라. 진수가 한 번 구경하기를 청하거늘, 태용이 성사께서 고대하심에 의리상 지연시킬 수 없어 마침내 듣지 않고 돌아오니라.

8월에 학몽사가 준공되어 동지공(대도존사)과 정공(성도존사)의 화상을 그려 학몽사에 봉안하니라.

 

신미년(개도58년 1931년) 정월에 금강도 간사장의 책임을 배수하고,

임신년(개도59 1932년) 8월에 대법당 건축의 명이 있으시어 수원에 가서 목재 한 차를 구입하여 제재하고 대법당 기지를 수치(修治)하니라. 하루는 성사께옵서 춘풍헌에 계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기와집이 헐린 후에 내 도가 다시 일어나리니, 그때 마음 변치 않을 자가 능히 몇 사람일고” 하시다.

(다음 6편에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