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대도 .도덕으로 개화되는 세상.

도성훈통고 (道聖訓通攷)/수행기(修行記). 信편 61

삼종대성전 재건 단체원 50여 명을 결성하여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기(修行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32-2 이경무(호 송강)는 뱃속 도인으로 신사(1941)사변 후에 (2) 일본이 신사사변을 자행하여 대도를 탄압함에 금강도인들은 바람앞의 등불로 혼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졌다. 일본 정치가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자 하여 만주 이민을 추진하고 청장년 무리를 몰아가서 징병, 징용에 충당 되었으며 청장 소녀들을 유인하여 정신대로 일본 군대에 편입하였다. 이때 도성사부님은 금병산 후록 밤절을 정하여 구의사와 변만규와 나(경무)로 하여금 토굴을 만들어 비밀히 거주하시다가 어느 날 새벽에 일찍이 아침 찬을 마치고 ..

일본 경찰의 거주제한으로 감시가 심하여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기(修行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32-1 이경무(호 송강)는 뱃속 도인으로 신사(1941)사변 후에 (1)도성사부님이 조치원 신흥동(새터마을)에 계실 때에 일본 경찰이 거주제한으로 감시하여 사부모님의 출입은 물론이요, 제자들의 출입도 무릇 쉽지 않음이라. 금천에 있던 전예호가 식량 전달함을 나한테 말하여 백미 세말을 등에 지고 밤을 타서 걸어 조치원 근방 무심천 다리 아래 백사장에 이르러서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잠깐 졸다 보니 동쪽 햇살이 이미 밝았다. 심히 당황하여 신흥동에 이르러서 숨어 들어갈 것을 연구하였더니 마침 경관이 없어..

남무아미타불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기(修行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31 윤갑연(호 종고)이 모셔보니 도성사부님께서 전대에 듣지 못하던 글 가르침을 청아한 소리로써 읊어 주시니 말씀하시기를 “남무본사를 만나니 남천 하시어 인연을 얻어 중생들을 제화하신고로 모든 부처들이 도회지처럼 모이는 성스러운 곳에 자비로움이 한결같으니 포덕하심이요, 아미본사를 만나게 되니 나는 보단을 만나서 중생을 제도한 고로 마괴가 소멸하는 성스러운 땅에 도덕이 한결같으니 만인들이 머리를 들음이요, 타불의 본사를 만날 것이니 통천이 대를 이어서 중생을 널리 화하는 고로 칠세조상이고등락 하는 성역에..

정녕히 가르치심을 어찌 감히 잊으랴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기(修行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30 유태석(호 운록)이 9살 때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을 이끌고 공주군 정안면 사현리 정 많은 고향을 떠나 동쪽 집에서 자고 서쪽 집에서 얻어먹다가 공주 경천의 노루목 다리 외딴집 근처에 이르러서 또 어머니와 동생을 이별하고 천원군 수신면 엄정리 홍만표의 집에 가서 머슴이 되어 얻어먹을 당시에 행실이 곧으며 마음이 굳고 여력이 보통사람에 지나서 사람이 다 녹두장군이라 이름이라. 그 동네 사는 도인 장운규와 그 아내 초광의 권유로 입도하여 자주 성화를 듣고 단신으로 금천에 들어와..

하늘의 군사가 도와주시어 살길을 열어주시리니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기(修行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29 유정예(호 영월)가 경인(1950)년에 도성사부님 성훈을 어머니 강목단에게 들으니 경인년 정월 성재에 말씀하시기를 “올해는 ‘놀랄 경驚’자 ‘사람 人’자의 경인년으로써 무슨 일이 있을 것인데 절대로 당에는 들어가지 마라” 하시더니 몇 달 후에 6월 25일을 기하여 북쪽 군대가 갑자기 남쪽 땅으로 쳐 들어와서 저 당원들이 각 동네의 가축들을 잡아먹고 이장을 동행하여 부녀자들한테 여성 동맹당에 가입함을 강요하나 어머니는 사부님의 분부를 생각해서 그들의 요구를 듣지 않고 뒷산에 토굴을 파고 전 가족이 ..

대성사부모님 치성을 올리지 못하여 황송함을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기(修行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28 오희성(호 초진)이 00년 전에 도성사부님께서 조치원 서태말 별다른 집에 계실 새 정갑춘(월학)으로 하여금 저를 부르시어 나가 배알하니 사부님이 말씀하시기를 “신사(1941)년 왜변을 당하여 대성사부모님 치성을 한 번 올리지 못하여 황송함을 헤아릴 수가 없음이라. 부강 시내 사는 곽흥원이 집을 판다는 말이 있으니 그 집은 큰 집이며 시가는 일만 원 정도가 되니 네가 힘써서 구하여라. ” 대답 올리기를 “불가 하옵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불가하냐?” 대답 올리기를 “친일파 무리가 부..

자손은 다 자기 복을 받고서 태어남이니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기(修行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27 오영권(호 연담)이 말을 하니 김소순(단성)이 일찍이 나의 아내가 되어서 낙도안빈의 주체로 근검절약을 일삼았다. 하루는 내가 다른 집으로 품팔러 가서 저녁 늦게 돌아와 맥이 풀린 것 같이 기분이 좋지 아니하여 인생의 재미가 없음을 항시 토로하고 아들 두기를 심히 바랬다. 아내는 이미 딸 셋을 낳았으니 모름지기 본인의 잘못으로써 자책하고 다른 도인들과 같이 성전 문안과 총회에 많이 참여하는 중에 무릇 마음속으로 ‘미륵대불님은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을 세상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 하니 아..

내외를 가리지 말고 반드시 큰절할 것이며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기(修行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26 오근영(호 지강)이 충북 청원군 낭성면 성대리에서 출생하니 아버지는 창선이라. 기미(1919)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감옥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더니 조모님의 환후가 위중함으로 말미암아 출감한 뒤에 곧 선화를 하고 농토는 수해를 당하여 도무지 생활을 이을 수가 없어서 가덕면 노동리(서당골)로 이사하고 학교 입학을 간청하니, 어머님 전종(신단)이 말씀하시기를 “머리를 깍고 학교에 다니면 반드시 왜놈이 될 것이니 너는 어진 스승을 가리어 한문을 배워라.” 어머니는 성문에 폐..

금강연화체를 보호하면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기(修行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25 여옥순(호 근단)이 일찍이 성훈을 많이 들었으며 성적을 많이 뵈었고 또 두 오빠의 말씀을 들었으나 많이 잊어버리어 별달리 기억할 것이 없음이라. 다만 성훈의 명문을 기억해서 다시금 사부님의 특이한 기상과 청아한 소리를 찾아서 말을 해본다면 말씀하시기를 “도가 춘추에 있는 고로 금강이 몸이 되고 도가 팔천문인에 둔고로 금강이 마음이 되고 도가 오천 시에 있는 고로 금강이 성품이 되느니라. 그런 고로 인연됨이 같음이여! 삼조의 시작이요, 오덕의 마침이니 옛적의 성인 가르침이여! 세 번 고무한 것이 이..

도담을 듣고서 좋은 생각에

일제식민지, 6. 25 전란 혼란의 시대에 스승님과 제자의 수행기(修行記)를 모아 법문집으로 출간 되었으며 , 인류중생 구제을 위해 깨우침을 주신 글을 게재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성성훈통고 信편. 8-24 양영분(호 적단)은 일찍이 이장춘이 금천에 갈 것을 권함으로써 시부모님께 친정 다녀올 것을 고하고 집을 나와 사방을 돌아보니 사람이 없었다. 다른 길을 가려 방고개를 넘으니 우리 동리와 청주와 진천 도인 15명이 이미 와 있었다. 마침 상여(행여)가 나타난 고로 머리를 굽혀 숨을 곳을 찾았다. 길이 멀어 다리가 아팠으나 처음 가는 길 가운데 신발이 떨어지면 시아버님의 염려가 있어서 사람이 보지 않을 때는 신발을 들고 볼 때는 신발을 신으니 녹죽부인이 말하기를 “신발은 중하고 발은 중하지 않느냐?”..